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전 기사단 (문단 편집) === 몰락 === 십자군 전쟁이 [[살라흐 앗 딘]]의 지도 아래 이슬람군의 우세로 기울면서 성전기사단은 존립 근거가 희박해졌다.[* 당시 전투에서 기사단의 총장이 포로가 되면서 항복보다 죽음을 택하는 성전기사단의 명예가 실추된다.] 아크레 함락 이후 취임한 총장 [[자크 드 몰레]]는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기사단의 개혁을 주장하며 외교와 무역을 통해 기사단 본부인 [[키프로스]]의 무역을 강화시키고, [[맘루크 왕조]]를 공격하기 위한 군사 동맹 구상에 참여하는 등 기사단의 중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비록 군사 동맹은 1302년 루아드 공성전의 패배로 기사단이 근동 본토의 거점을 완전히 상실하면서 사실상 실패로 끝났으나, 자크 드 몰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단의 재력과 외교 수완을 발휘해 여전히 대규모 십자군의 필요성을 설파하였다. 이때 13세기 말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전쟁 등으로 인해 막대한 돈을 쓰고 있었는데, 돈 나올 구석이 없던 그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돈 놀이나 하며 기사단들 사이에서도 고립된 성전기사단을 털자'''는 것이었다. * 근현대처럼 세금수취체계가 발달하지 않았던 이 시대에는 효과적인 세금 수취 자체가 극히 어려웠기에 전쟁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국가 재정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해결책은 대외원정을 통한 전리품등의 형태로 재정을 충당하는 것이지만, 유럽 내에서 이게 가능하던 시절은 중세 초기에 끝나버렸고, 따라서 어지간한 군주들로써는 이런 수단을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근세에 세력을 떨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는 신대륙에서 수탈한 막대한 귀금속을 기반으로 권위를 강화했다.] 따라서 서유럽 군주들의 재정 패턴은 기본적으로 일단 돈을 쓰고, 모자라면 은행가들에게 빌리든지 조세수취권을 팔아치우든지 해서 땜빵하고, 그러다 국가 재정에 땜질도 불가능할 수준으로 빵꾸가 날 수준이 되면 그동안 강화된 왕권을 이용하여 만만한 놈을 조져서 털든지, 나 빚 못 갚는데 니가 어쩔 거냐, 왕 배 한번 째볼 거냐 식으로 해결하는 식으로 재정난을 해결했다. * 결국 이 시대에 정부(왕)을 상대로 돈놀이를 한다는 건 현대 국가의 국채를 사는 것 같은 안정적인 투자처가 아니라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위험한 사업이었다. 왕을 상대로 돈놀이를 하려면 일단 빌려주다가 재정 파탄도가 올라가면 다른 금융업자에게 폭탄을 돌리고 발을 뺀다거나, 왕이 '다른 데 빚을 째고 말지 얘네 빚을 째면 뒤탈이 염려된다'고 할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다거나, 정 뭐하면 왕의 권력으로 조져지기 전에 일정한 수준에서 빚을 탕감해주는등의 요령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성전기사단의 경우 독자적인 집단으로서 성전 노선을 타던 다른 기사단들과 달리 여전히 대규모 십자군 원정에 의한 성지 탈환을 지향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 외교나 무역 등에 의한 재원 확보를 중심으로 기사단을 꾸리다 보니 축재된 재산들이 눈에 잘 띄게 되었으며, 이것이 화가 되어 프랑스 지부를 노린 필리프 4세의 음모에 걸려들고 만다. 필리프 4세는 확실하게 이들을 작살내기 위해서 치밀한 계획 하에 행동했다. 우선 그는 [[구호기사단]]과의 합병 문제를 논의하고, 프랑스에 돌던 기사단 관련 유언비어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프랑스에 방문한 총장 [[자크 드 몰레]]를 거짓말로 안심시켜 푸아티에에 묶어 놓았다. 이후, [[아비뇽 유수|아비뇽에 유수]] 중이던 [[꼭두각시]] 교황 [[클레멘스 5세]]를 이용해, 성전기사단에게 [[남색]], [[악마]] 숭배 같은 반그리스도 행위에 대한 죄를 물어 프랑스 지부 단원들을 기습적으로 모조리 잡아들인 뒤[* 총장 자크 드 몰레를 포함하여 230명이 체포되었다.] 이단이라는 누명을 씌웠다. 이 체포와 즉결 처형을 비롯한 모든 것이 시작된 그날이 바로 저 유명한 '''13일의 금요일'''이었다. 결국 기사단원들은 고문 끝에 모두 입회식에서 [[십자가]]를 짓밟고 모욕했으며 [[바포메트]]를 숭배했다는 자백을 하게 된다. 물론 재판이 열리자 이들 전원은 그 자백을 부인하고 억울함을 호소했으며, 그래서 재판이 꽤나 길어졌다. 그러나 프랑스 왕의 꼭두각시인 교황은 그저 왕이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이니, 결국 1311년~1312년에 개최된 [[빈(오스트리아)|빈]] 공의회에서 교황은 성전기사단의 해체를 결정했다. 사실 교황은 성전기사단이 약간 의심스러운 구석은 있었을지라도, 날조되고 누명씌워진 악마숭배 같은 말도 안되는 혐의에서는 [[무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교황청 자체 조사를 통한 시농 양피지 문서(21세기에 바티칸 고문서 보관소에서 발견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등을 통해 성전기사단에게 교회 사면령을 결정했으나 이는 왕의 압력으로 인해 공표가 늦어졌고, 철저히 묻혔다. 결국 성전기사단은 악마숭배자 단체로 몰려 강제로 해산당했다. 재판 중에 대부분의 프랑스 지부 기사단원들이 고문을 견디지 못해 죽고, 자크 드 몰레와 프랑스 지부의 핵심 간부 3명만이 살아남아 사형 판결을 받고 화형당한다. 이후, 국왕 [[디니스 1세]]가 직접 나서서 기사단을 보호하고 새 조직으로 개편한 [[포르투갈]]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에 존재하던 수백 개의 성전기사단 지부들 또한 그 뒤를 따라 각국의 군주들에 의해 해체되어 사라진다.[* 단, 이들은 당연히 프랑스의 정세와는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형식상의 재판을 받은 뒤 방면되거나, 다른 기사단으로 적을 옮기거나, 연금을 받고 노후를 보내는 등 비교적 평온한 최후를 맞았다.] 필리프 4세가 갑자기 성전기사단을 잡아들인 이유가 불분명했기 때문에 이 사건은 이후 수없이 많은 추측을 낳았는데, 현재 일반적인 평가로는 재정 궁핍에 시달리던 필리프 4세가 최대 채권자였던 성전기사단의 채무를 없애고, 이들의 재산을 몰수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필리프 4세는 프랑스 내의 유대인들에게서 세금을 징수하여 거두기도 했고 내지 못하는 유대인은 추방하기까지 했다.] 다만 오늘날의 연구에 따르면 그렇게 몰수된 많은 재산들이 상당 부분 구호기사단과 같은 다른 조직에도 흘러들었다는 점을 들어 정치적인 목적이 더 큰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요컨데 국민 국가 관점에서 보나 왕권 강화 관점에서 보나 프랑스 왕의 입장에서 군사력, 재력, 종교적 권위까지 모두 갖추고 있는 데다가 국제적인 영향력까지 행사하고 있는 성전기사단은 언젠가는 반드시 숙청해야 할 대상이었다. 게다가 당대 총장 [[자크 드 몰레]]는 전세가 기울어진 당시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규모 십자군 원정의 필요성을 설파하며 프랑스 왕의 교황청에 대한 간섭에 사사건건 방해가 되던 강경파였고, 거기에 그런 구상을 어느 정도 실현할 만한 외교적, 경제적 역량을 가진 위험인물이었다. 결국 필리프 4세의 입장에서 성전기사단은 단순히 돈 많고 만만한 빚쟁이가 아닌, 교황권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잡고 프랑스 왕국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반드시 쳐내야 할 장애물이었고, 이것이 단순히 프랑스 지부의 영향력을 척결하는 것이 아닌, 성전기사단이라는 집단 그 자체를 뿌리 뽑아야 한다는 결정으로 연결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